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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족이 사는법 꿈꾸는 대로 살아 본다는 것]

소통 화합 2016. 1. 31. 03:11



이동하고 싶었다, 간절히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자 이상하게도 참 홀가분했다. 회사는 십수년간 내 생활의 중심이었고 내 정체성의 일부였는데, 그토록 긴 세월 부여잡고 몰두했던 것들이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회사가 싫었던 것도 아니고 인간관계가 나빴던 것도 아니지만, 하나의 인연이 이제 다했다는 느낌이 뚜렷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출판 편집자로 밥벌이해온 시간도 좋았다. 다양한 저자들과 매번 새로운 책을 기획해 만드는 비반복적 노동의 긴장을 즐겼고, 한 권의 책이 내 손을 떠난 후 교정지더미로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며 누리는 짧은 이완을 사랑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 제공하는 소속감과 생활비, 외부적 인정 따위는 그 무렵 나의 내면에서 격동하는 열망을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삶을 재배치하고 싶었다. 손에 쥔 것들을 놓아야 새 기운, 새 흐름, 새 일거리가 스밀 수 있을 터. 나는 이동하고 싶었다. 간절히.


내가 회사를 떠날 때, 초등대안학교를 다니던 아이도 학교를 그만뒀다. 반년쯤 아이와 함께 목공방과 도서관에 놀러 다녔다. 홈스쿨링이랄 수 있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없으니 아이나 나나 다 학생이었다. 농사 공부, 목공 공부, 풀 공부, 나무 공부, 마음 공부… 하고픈 공부가 너무 많아서 가슴이 뻐근하니 벅찼다. 그 무렵 나는 목수가 되고 싶었다. 여자라고 목수 못 하라는 법 있나? 목공예도 하고 싶고, 가구도 만들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집까지 내손으로 짓고 싶었다. 꿈꿀 때는 가슴이 뛰는 법이다.


▲ 퇴사하기 전부터 공방에 다니며 원형톱과 테이블쏘, 직쏘, 루터 등 전동공구 사용법을 익혔다. 

책장과 서랍장을 짜고, 겁 없이 흔들의자에도 도전했다. 이때 익힌 목공의 기본은 이후 시골생활에 두고두고 쓸모가 되어 주었다.


낯선 삶으로 들어서다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주변의 시골을 다니며 살 곳을 찾았다. 신도시 주변에서 점점 도시로 편입되어가는 곳은 일차 제외시켰다. 넓은 논밭이 야금야금 공장지대로 흡수되고 있는 곳도 장기적인 삶터로 부적합했다. 우리가 원하는 곳은 첫째, 도시화의 위험이 적고 농촌 마을의 정체성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곳, 둘째, 남편 직장과의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출퇴근이 불가능할 정도는 아닐 것, 이렇게 두 가지였다. 이 조건으로 보니 강화도만한 곳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강화의 셋집들을 뒤지던 어느 날, 전셋집 하나가 나왔다. 그 길로 혼자 차를 몰고 강화로 갔다. 넓게 펼쳐진 논과 밭, 마을길 따라 늘어선 낡은 구옥들,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들이 밭고랑에 엎드려 일하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관광지다운 면모가 전혀 없는 평범한 시골이라서 마음에 들었다. 마을 끄트머리 산 아래 외딴집을 본 순간 ‘좋아, 여기서 살아보자’ 싶었다. 휴대폰으로 집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내 동의를 얻고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불 한 채, 밥솥과 그릇 몇 개, 옷가지 약간을 꾸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으로 아이와 함께 들어왔다. 이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산 아래 있는 전셋집은 밤이 되면 인적이 끊겼다. 불빛도 완벽하게 지워져 온 세상이 칠흑 속에 잠겼다. 낯선 짐승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들렸다. 무섭지는 않았으나 낯설고 기이했다. 마흔 해를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지점에 와 있다는 걸 실감했다. 다소 막막한 심정도 있었지만,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흘러가려는 걸까, 무엇이 나를 이끌어갈지 한번 지켜보자’ 하는 호기심과 흥미가 일었다. 인생의 막 하나가 등 뒤로 닫히고 전혀 새로운 막이 열린 느낌이었다.


▲ 집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강아지 보리와 산책을 하곤 했다.

나무 위에서 산비둘기가 꾸루룩 꾸룩, 발 밑에서는 풀벌레가 톡톡… 

가만히 쪼그려 앉아 풀더미 속을 들여다보면, 꼬물거리는 애벌레 한 마리조차 제 몫의 삶을 최선으로 살고 있었다.


마을의 품에 안기다

아이는 한 학년이 10명 남짓한 시골 초등학교에 4학년으로 들어갔다. 도시에 익숙한 삶을 통째로 뽑아서 옮겨왔으니, 아이 역시 낯선 사회에 적응하고 뿌리 내리느라 초반에는 상당한 긴장을 치렀다. 그래도 아이는 마을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며 마주치는 사람마다 꼬박꼬박 인사를 잘해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밭에 쪼그려 앉아 메뚜기들의 짝짓기를 구경하고, 집 뒤편 개울에서 가재를 보고 환호하고, 하교 길에 마주친 죽은 두더지를 엄마 보여준다고 들고 오기도 했다. 가을엔 아빠랑 양동이 들고 밤을 줍고, 엄마의 텃밭 농사도 제 깜냥껏 도왔다. 그토록 원하던 강아지도 키우고 새 친구도 사귀어, 생일에는 학교 아이들이 대거 집으로 몰려오기도 했다.


남편은 팔리지 않는 아파트에 혼자 남아 회사를 다니다가 한 달 후 모든 살림살이를 정리해 전셋집으로 옮겨왔다. 출퇴근길은 왕복 70km가 넘었으나 막히지 않아 1시간이면 충분히 회사까지 갈 수 있었다. 남편은 마을 어르신들과 어울려 막걸리나 소주 마시는 걸 즐겼고, 나는 가까운 이웃집 밭일 거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의 품에 서서히 안겨 갔다.


▲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는 해질녘까지 들판을 쏘다녔다.

논두렁 아래 죽어 있던 들쥐 이야기, 차에 깔린 뱀 이야기, 짝짓기 하는 메뚜기 이야기를 신이 나서 엄마에게 늘어놓았다.

아이가 혼자 발견한 세계는 아이 인생에 두고두고 최고의 선물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에 머물기

집에 찾아온 친구나 지인들한테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무섭지 않느냐”는 것이다. 산 밑에 외따로 떨어진 집이라 그런 느낌이 드는가 보았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무서운 느낌을 가진 적이 없다. 아침엔 새소리에 잠을 깼고, 낮에는 몸을 움직여 일을 했고, 밤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깊은 잠을 달게 잤다. 도시에서 겪었던 불면은 사라졌다.다양한 산짐승의 소리는 무섬증보다는 호기심을 촉발시켰는데, 소리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말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느냐”이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낸 적이 없다. ‘용기’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렵고 힘든 일을 해낼 때 필요한 마음가짐인데, 나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을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일은 ‘쉬운 일’이다. 나는 간절히 원했고,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뿐이었다.


세 번째로 많이 듣는 말은 “부럽다, 하지만이다. 시골살이를 하고 싶어도 걸리는 게 너무 많다는 거다.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 교육이고, 그 다음이 직장이고, 그 다음은 백화점 영화관 같은 문화시설의 부족이고 그뿐인가? 시골집은 아파트만큼 안락하지 않고, 밤은 너무 어둡고, 밭일은 힘들고, 시골 노인들은 간섭이 심하고, 도시에서 맺은 관계들은 어쩔 것이며, 등등 결행을 가로막는 악조건은 끝이 없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 모든 말은 사실 “내가 원치 않는다”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어디에 살아도 괜찮다고. 그냥 당신이 원하는 곳에 살면 된다고. 나에겐 지나온 삶을 통째로 뽑아 들고 올 만큼 이 삶이 간절했지만, 도시에서의 삶의 토대와 그 속에서 이어갈 당신의 미래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다만 이쪽에 서서 저쪽을 부러워하는 건 자신의 ‘지금, 여기’를 놓치게 되어 스스로에게 손해이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잘 살펴서 알면 된다고.


▲ 고마리, 여뀌, 닭의장풀, 개쑥부쟁이로 만드는 꽃차.

새벽 숲길 거닐며 작은 꽃송이 몇 따서 채반에 널어 말리는 동안 눈이 한껏 즐거웠다.


어쨌든, 도시에서 태어나 마흔 해가 넘도록 시골살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겁대가리 없는 도시내기 여자와, 시골에서 태어나긴 했으되 땔감 줍고 꼴 베는 면피성 노동 말고는 본격적인 농사라곤 해본 적 없는 시골 출신 남자, 강아지를 키우자는 감언이설에 속아 익숙한 도시와 이별한 순진한 어린이, 그리고 첫 시골살이의 동력이 되어준 삽살강아지 보리까지, 도시에서 온 이주민 네 식구는 이렇게 낯선 삶으로 직진해 들어갔다. 앞날이 얼마나 험난할지 가히 짐작도 못하면서 그저 하루하루 희희낙락, 갓 말 배운 유아처럼, 갓 입학한 초등학생처럼 모든 것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처음처럼 배워나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고 귀한 인생의 시간에 감사하고 또 감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