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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대건축의 4대거장

소통 화합 2018. 4. 10. 18:01

근대건축의 4대 거장

근대건축의 4대 거장 - 그로피우스, 미스반데로에, 르 꼬르뷔지에, 알바 알토

발터 그로피우스

현대건축의 건축가들의 경향이 대부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활동이었다면 그로피우스는 협동작업을 주장하여 이를 사무실의 지침으로 하여 소장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었으며 또한 그는 건축교육에 지대한 관심과 정력을 모아 현대 건축교육의 바탕이 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엿다.

그의 이념은 '건축은 광범위한 종합예술'이라고 믿어 건축가들의 협동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 (회화, 조형물 등)를 개입시키고, 또한 작품의 실현을 위하여 수공법에서 다량생산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입하여 실습아였으며, 설계에서은 건설업자를 참여시켜 건설과정을 학생들레게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이 바우하우스는 설계의 착안에서 실현단계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건축교육에서 처음으로 보여 주었다.

그로파우스는 1883년 5월 18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그 중요한 역사는 이미 널리 알려진 공장건물의 획기적인 시도를 한 fagus werk를 1991년에, 바우하우스 뎃사우 교장이 된 것이 1925년, 그 다음에 베를린 사무소를 개설한 것이 1928년이었다. 그후 잠시 나치의 집권으로 독일에서 피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영국 런던에서 막스웰 프라이와 건축사무소를 경영하였다. 1937년 미국으로 건너와 케임브리지, 매사추에츠에 자리를 잡고 하바드대학 Graduate School of Design에서 건축 교수로 봉직하였다.

그후 1945년에 T.A.C.(The Architects Collaborative, Inc.)를 케임브리지에 개설하여 공동작업의 중요성을 건축하는 사람에게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1969년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대건축의 건축가들의 경향이 대부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활동이었다.그러나 일찍이 그로피우스는 협동 작업을 주장하여 이를 사무실의 지침으로 하여 소장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이르기까지 각자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건축교육에 지대한 관심과 정력 을 모아 현대 건축교육의 바탕이 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였다.

그의 이념은 "건축은 광범위한 종합예술"이라고 믿어 건축가들의 협동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회화,조형물 등)를 개입시키고, 또한 작품의 실현을 위하여 수공법에서 다량 생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입하여 실습을 시작하였고, 설계에서는 건설업자를 참여시켜 건설 과정을 학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육이념은 건축,미술,공예분야 등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하고 거기에 따르는 이론과 실기를 연구하는 건축교육을 구상했다.

그래서 구라파 전 지역에서 각 분야의 유능한 전술한 강사진을 초빙하여 이론과 실기 교과과정을 개설하였다. 이론의 기초과목중에 평면,입체,조각,공간,색,조형,도학,제도 등을 연구하였다.

실기 수업으로 예비과목으로 자연,역학,재료공학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세분화하여 돌,나무,점토,유리,철직물 등에 관한 연구, 분석을 통 하여 재질의 특성을 이해하였다. 바우하우스의 기초,예비과정은 원리와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창작의 준비로서 학생들은 글자를 쓰기 전에 선을 배웠고,조각을 하기 전에 형태를 이해해야 하였다. 이와 같은 기초과정을 수료한 후에 작품과 실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모형을 만들면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1/100,1/200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를 시작해서 건축과 그 관련(미술,조각,철공,목공,가구,도자기,사진,그래픽디자인,편물,공업디자인,인테리어 디자인,단지계획등)의 포괄적인 교육을 한 것은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 특히 미국에 현대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건축의 건축가들의 경향이 대부분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작품활동이었다.그러나 일찌기 그로피우스는 협동 작업을 주장하여 이를 사무실의 지침으로 하여 소장에서 모든 직원들에게 이르기 까지 각자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업환경을 만들었다. 그는 또한 건축교육에 지대한 관심과 정력을 모아 현대 건축교육의 바탕이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였다.

그의 이념은 "건축은 광범위한 종합예술"이라고 믿어 건축가들의 협동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회화,조형물 등)를 개입시키고, 또한 작품의 실현을 위하여 수공법 에서 다량 생산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입하여 실습을 시작하였고, 설계에서는 건설업자를 참여시켜 건설 과정을 학생에게 가르쳐 주었다.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육이념은 건축,미술,공예분야등의 상호연관성을 강조하고 거기에 따르는 이론과 실기를 연구하는 건축교육을 구상했다.그래서 구라파 전지역에서 각 분야의 유능한 전술한 강사진을 초빙하여 이론과 실기 교과과정을 개설하였다. 이론의 기초 과목중에 평면,입체,조각,공간,색,조형,도학,제도 등을 연구하였다.

실기 수업으로 예비과목으로 자연, 역학,재료공학과 재료에 대한 연구를 세분화하여 돌,나무,점토,유리,철직물 등에 관한 연구, 분석을 통하여 재질의 특성을 이해하였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모형을 만들면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1/100,1/200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 크기로 만들었다. 바우하우스를 시작해서 건축과 그 관련(미술,조각,철공,목공,가구,도자기,사진,그래픽디자인,편물, 공업의장,인테리어 디자인,단지계획등)의 포괄적인 교육을 한것은 독일 뿐만 아니라 영국 특히 미국에 현대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

유리와 철의 미를 창시한 근대건축의 거장으로도 불리는 그는 그가 설계한 건축물들을 통해 현대 도시의 이미지를 창조해내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단순한 형태, 시각적 조화, 비례, 흐르는 공간(flowing space), 유니버설 공간(universal space), 수직적 수평적 확장성 등은 그의 작품에 대한 여러 사람의 표현들이다. 그러면 그의 작품들이 왜 그렇게 평가받고 있는지 그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살펴보겠다.

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는 1886년에 독일의 아헨에서 태어났고 1900년에서 1902년까지 아버지의 공방에서 돌과 벽돌 쌓는 기술을 배웠고, 1905년에 공예가인 브루노 폴(Bruno Paul)에게서 목공기술을 익혔으며, 1907년 건축가 피터 베렌(Peter Behrens 1908-1911)의 사무실에서 철과 유리 등 새로운 재료의 취급법을 습득하였다. 1914년 베를린에 자신의 사무실을 세웠고 '칼 프리드리히 슁켈(Karl Friedrich Schinkel)'의 19세기 네오 클래식 건축에 크게 영향을 받은 초기작품(Kroller주택, 1912)을 시작으로 철과 유리에 의한 고충건물, 주택 등을 설계하였다.

1920년 독일공작연맹부회장이 되었고 1927년에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주거방식과 주택을 연구하고 선전하기 위해 '바이센호프 지드룽 전'이라는 주택전시회를 독일에서 개최할 때 총 감독직을 맡고 암 봐센호프(Am Weissenhof) 14-20번지 아파트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9년에 바르셀로나(Barcelona) 국제전시회의 독일 파빌리언(철근콘크리트 슬라브를 지탱하는 크롬합금의 스틸 지주, 대리석, 색유리 벽체 등을 이용)을 설계하였고 1930년에서 1932년까지 베를린의 바우하우스에서 학장으로 있다가 나치를 피해 1938년에 미국 시카고로 갔다. 미국에서 현대건축가로서 시카고에 있는 파스워쓰 주택(Farnsworth House, 1946-1950), 뉴욕에 있는 씨스램 빌딩(Seagram Building, 1954-1958), 시카고에 있는 콘트리트 골조로된 프로몬트리 아파트(Promontry, 1947) 등을 건축하였고 이러한 건물들은 대표적인 현대건축물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전생애를 통해 건축해 놓은 여러 작품의 특성을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작품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는 '단순미'로 표현 할 수 있는데 재료뿐 아니라 공간속에서 간결하고 명쾌한 단순미가 드러난다. 그의 뛰어난 비례감과 재료에 대한 높은 식견은 이러한 단순미를 배가시켰고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그는 순수한 건축형태를 추구하였다.

둘째, 다른 하나의 작품특성은 '시간적 변화를 수용하는 공간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대해 공간의 형태뿐 아니라 기능에까지 융통성을 부여하므로서 시간적 변화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한 대표적 건물로는 1929년 바르셀로나 국제전시회의 독일 파빌리언과 1930년 브르노(Brno)에 건설된 투겐타트 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그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로서 건축의 가능성을 새로운 형태에서 뿐 아니라 경제적 구조와 기술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그의 그러한 건축세계가 엿보이는 1950년 일리노이드 공대에서 행한 강연문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정리하고자 한다.

'건축은 그 시대에 존재하며,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를 구체화시키고, 그 형태에 의해 서서히 전개되어 왔다. 공업과 건축이 밀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들이 동시에 성장하게 되는 것이고, 또 언젠가는 한편이 다른 편을 표현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실현된 건물을 비로소 우리는 건축이라고 명명하고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건축은 우리시대의 정확한 상징이다.'

르 꼬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965

1920년대 국제주의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 철근 콘크리트 골조를 근대 건축의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켰다. 스위스의 라쇼드퐁에서 태어난 꼬르뷔지에는 1920년대 건축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본명은 Charles-Edouard Jeanneret. 정규 건축 교육을 받은 적은 없고, 유럽과 중동 일대를 여행하며 독자적으로 건축을 연구했다. 1917년 파리에 정착한 뒤 피카소, 브라크 등 입체파 화가와 교류를 가졌다. 입체파 화가들과의 교류는 꼬르뷔지에가 철근 콘크리트 골조를 기반으로 내부와 외부 공간이 서로 연결되는 구조를 실현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20년대 잡지 ‘에스프리 누보’ 등에 기고와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 등의 저술 활동을 통해 국제주의 건축의 사상적인 기수가 되었다. 대표작으로는 1920년대의 주택 건축물로 페사크 주택단지,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 가르셰 주택, 푸아시의 사보이관 등이 있으며, 30년대에는 구세군회관,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 파리교외 주말의 집, 브라질의 문교보건부 등이 있다.

그가 평생을 두고 정성을 기울였던 작업은 1928년 결성한 근대건축국제회의의 이념에 바탕을 둔 도시계획안을 만드는 일이었다. 1952년 마르세이유의 거대 아파트 단지 ‘유니테’와 인도 찬디가르 신도시건설 등이 대표적이다.

알바 알토 (Alvar Aalto)

20세기의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인 알바 알토는 humanistic rationalist라고도 불려지고 있다. 선진적인 기술을 받아들이고, 일상생활의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유용성을 고려하고 자연적인 재료와 유기적인 형태를 추구하고 있는 그의 작품은 합리적이면서도 기계적인 것을 피하고, 대량생산을 고려하여 실용적이면서도 과거와의 연결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알바 알토는 1898년에 핀란드의 타올타네에서 출생하였고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측량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23세에 헬싱키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하였고 25세에 사무소를 유바스큐라에서 시작하였다. 초기 그의 작품은 네오 클래시즘의 영향을 받은 유바스큐라지역의 근로자회관, 교회 등이 있다. 29세에 사무소를 쿠우루크로 이전하면서 건설된 파이미오( Paimio)에 있는 결핵요양소(1928)는 당시 신선한 조형으로 그를 국제적인 건축가로 만든 작품이면서 북구건축의 주류를 기능주의로 바꾸어 높은 작품이다.

그밖에 당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비이 프리(Viipuri)에 있는 도서관, 써니라(Sunila)에 있는 공장과 노동자주택 등이 있다. 그후 후랑크푸르트 안 마인에서 개최된 CIAM에 참가하게 되고 사무소를 헬싱키로 옮기고 그 곳에 위치하는 레스토랑 "싸보이"의 인테리어를 디자인한다. 그리고 가구회사 아르텍(ARTEK)을 마이레아 그릭센 등과 함께 설립(1935)하여 그가 디자인한 가구류를 그곳에서 전매한다.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의 핀란드 전시관을 설계하여 다이나믹하고 유기적인 조형을 하는 건축가로 주목을 받게된다. 그외 주요작품으로는 메세추세츠(Massachusetts)주 캠브리지(Cambridge)에 있는 메세추세츠(Massachusetts) 공과대학의 기숙사(1949), 세이낫사로(Saynasalo)소재 국립연금협회(1957), 이마트라(Imatra)소재 교회(1958), 헬싱키 소재 문화센타(1958) 등이 있는데 특히 핀란디아 홀은 알토작품 중 최고의 결실로 평가된다.

 

 

 

 

 

 

 

 

알바 알토

 

인류는 고금을 통해 집단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에서 자연발생적 으로 주도적인 관념과 사상을 잉태 하였으며, 그것에 의해 비로소 그 소속집단 구성원들을 선도하고 일정 범위내에서 규제할 수 있 는 하나의 ""을 갖게 되었다. 이와같은 ""을 소위 문화(CULTURE)라고 한다면, 시대적 또는 지역적으로 해당 문화권에 접목 되어 있는 모든 피상체-인간, 물질, 철학, 심지어 건축까지를 포함하여-들은 그와같은 주도적 문화 기류에 순응하고 편승하며 때로는, 맹목적으로 그것을 추앙하 고 찬양하며 추종하는것이 일반적인 흐름일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론, 원시 고대의 어눌한 토테미즘 신앙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또, 오늘날에 있어서도 불문율과도 같은 마치 자석이 자기장의 권역 내에 있는 모든 쇠붙이들을 흡수해 버리듯이 강력한 압력으로 한시대 또는 한지역을 일률적으로 통합시켜 버리곤 해 왔다. 그와같은 일종의 문화사조는 그시대 또는 지역을 강압적으로 대표하지만, 그들 내부의 어느곳엔가 암암리에 기생하고 있는 모순 과 단점을 파헤치고 일시에 돌출해버리는 선구자적 요소에 대해 서는 적당히 합리화시켜 결국은 수용해야할 부분마저도 그대로 사장되어 버리고만마는 폐단은 인류의 역사 어느곳에서도 쉽게 찾아 볼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주제를 설정함에 있어서, 위의 표현이 다소 비약적이고 역설적인 면도 없지는 않지만, "근대건축"이라는 거대한 일종의 "집단"안에 서 주도적인 기류에의 맹목적인 편승보다는 오히려 자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건축이론적 체계를 구축하고, 독자적이고 주관적인 건축영역을 확보한 핀란드의 근대건축가 알바알토에 관해서 서술 하고자 한다.

 

-알바알토 건축작품의 특징-

근대건축은 혼란과 더불어 합리성, 기능성, 보편성 및 기술적인 미를 추구한 소위 "국제기능주의"가 주류를 이루어 왔던것이 사실 이며 Le Corbusier, W.Gropius, Mies Van der Rohe, F.L.Wright 등 거장과 더불어 알바알토 역시 근대건축을 이끌어온 대표적 작 가임에는 틀림 없으나 그들과는 다른 특이하고 독창적인 건축 세 계를 구축하여 왔다.

( 자료 : 이경규, 「알바알토 건축작품 특성에 관한 연구」, 석사논문, 건국대학교 대학원, 1987 ) 과거의 건축적 유산을 수용함과 동시에 20세기 초 건축의 새로 운 발전을 주도하던 근대건축은 그 시대적 위치와 더불어 건축 역사의 연장선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 다분히 기하학적인 형태내에서 기능성을 중시하며 보편성과 합 목적성을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거대한 근대건축 흐름의 한 가운 데에서 알토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건축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 던것은 북구(Nordic)에 위치한 자국의 지형적, 정신적 그리고 스 웨덴과 러시아의 식민지로서의 경험을 갖고 있는 역사적 요소로 부터 파생된 극렬한 민족주의적 정서와 더불어 Erik Gunnar Asplund로부터의 자율적인 영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토 자 신의 독창적이고 주관적인 사고의식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알토의 작품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이와 같은 자율적이고 유동적 인 그러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이와같은 요소들은 붙박이처 럼 고정된 관념이 아닌 하나하나의 개체가 살아서 조금씩 성장 하는듯한 유기체적인 환상을 일으키게한다.

건축가의 모든 사상과 이념들이 결집해 만들어낸 건축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 건축가를 특징지을 수 있는 요소를 발 견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알토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 고 있는 그의 특징적 요소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Light)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축가이다. 물론, 자국인 핀란드의 지형적 여건상 빛의 부족으로 인 한 어려움과 혼탁함을 경험했던것이 그 기본적인 배경 으로서 작용했겠지만 Wolfsburg 문화센터를 비롯한 거 의 모든 작품에서 천창과 고창을 이용한 자연 채광을 유도하고 있으며 또, 그 이용방식에 있어서도 로바니에 미의 도서관, 핀란드 국민 연금협회 도서관, 무라메 교 회등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한단계 여과된 자연 채광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근대건축의 주류를 이루었던 국제기능주의의 양식화된 기하학적 직선과는 대조적으로 알토의 작품에서는 다분 히 유동적이고 파동적인 곡선체계가 그 디자인의 핵심 을 이룬다.

이러한 곡선 사용의 배경인자로 생각할수 있는것은 우 선 핀란드라는 국가가 전 국토의 8%에 달하는 호수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알토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호수의 Image나 물결의 흐름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영감이 알토가 그의 작품을 구현하는데에 있어서 하나 의 구성요소로서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뉴욕 만국 박람회 핀란드관, 헬싱키 공과대학 오디토리움, 리올라 교구센터의 교회, 월프스브르그 교 구센터의 교회등에서 보여지는 천정과 벽체에의 곡면적 용 뿐만 아니라 특히, 그의 디자인 작품인 유리 꽃병 (1937)에서는 호수의 유동적인 이미지가 여실히 표현 되어 있다. 또한, 알토의 곡선사용의 배경으로 거론할 수 있는것은 그의 인본주 의적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딱딱하고 절제적인 반듯한 직선의 이미지에 비해서, 곡선의 이미지 가 보다 더 그의 건축적 이념을 표출하기에는 적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셋째, 알토는 단조로운 실내 평면의 활력소로서 "바닥면의 높이 변화"를 적용하였다. 특히, 핀란드 국민 연금협회 도서관에서는 내부 조형상 혹은, 도서관으로서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유효적절한 구성요소로서 작용하게 된다.

넷째, 그는 근대건축을 주도한 거장의 한 사람이였지만, 자국인 핀란드에 있어서는 위대한 애국자이면서 민족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건축가였다.

그의 어록가운데에서 Villa Mairea의 공사가 진행되던중에 그는 이 렇게 얘기 했다. "아마 원시시대의 건축예술은 발견의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것이다.

재료의 가공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때문에 자연속에서 미리 만들 어져있는 건축재료들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돌조각, 나무줄기, 그 리고 동물가죽등이 가장 쉽게 선택되었을것이고 그에 따라 건축 예 술은 발견된 재료들을 정확하게 조립하는 일이었다."

알토가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단적으로 목재와 벽돌 있었는데, 그것은 삼림자원이 풍부한 자국 핀란드의 주요 자연 생산 품 이었으며, 그로인한 목재와 벽돌의 건축에서의 사용확대는 적지 않은 이윤을 남겨주었다.

, 알토의 자연적인 건축재료의 사용은 그의 자연주의적 성향을 여 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성향은 1935년에 강연한 알토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예술과 순전히 물질적인 세계를 통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힌트 를 얻을 수 있다.

다섯째, "외부공간과 내부공간의 교류"를 알토 작품의 특성으로 예시할 수 있을것이다.

Villa Mairea, 세이나 찰로 타운 홀, 핀란드 국민 연금협회, 무라 찰로 여름 별장과 알토의 스튜디오에서 단적으로 볼수 있듯이, 대 지의 형상에 따라 건축물을 ""이나 ""형으로 둘러싸고 그 안 쪽에 ""을 형성하여 자연스럽게 실외공간을 실내로 끌어들이는 방식을 주로 취하고 있다. , 다른 방법으로 알토의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교제시키는 방 법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핀란드의 자연경관을 안뜰과 같은 매개 공간을 두지않고, 직접 내부공간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그 예 는 카레 저택에서 찾을 수 있다.

카레 저택은 전망이 좋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갤러리로 쓰이는 중앙 홀 주위로 여러개의 침실과 거실 및 식사실을 배치 하여, 각 실에서 시원하레 설치된 창을 통해 사방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숲과 대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자료 : 「알바 알토의 실내에 관한 연구」, 논문집, 상명여대 출판부, 1992 )-

"알바 알토"라는 건축가에 관한 해석 방법에는 여러가지의 접근 방식이 존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명확하고 깊이 있다고 생각 바로 자연 주의적인 측면에서의 해석 방법일것이다.

unctionalism National Romanticism Doricism의 단계를 거쳐오는 알토자신의 궁극적인 건축 이상의 실현은 살아 움직이는 건축 즉, 구성 요소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활동하는듯한 "성 적응"의 건축이었을것이다.

1918년경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옛것은 아무것도 그대로 재생되지는 않느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라지 않는다. 일단 존재한 모든것은 새로운 형태를 빌어서 항상 재부상한 알토의 어록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알토 자신이 생각하는 건축의 이 단지 합목적적이고 기능적으로만 충실한 표준화되고 규격화 되어 그와같은 보편적인 건축이 아니라 그 내·외부에서 살아 움직이는 유기적인 구성 체계를 갖는 그러므로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되는 곡면의 사용, 그리고 이와 얽히면서 무한히 충돌하는 가운데 공간 형성해 나가는, 부정형태와의 만남에 의해 이룩되고 구현되는 이른바, "성장하는 건축"일것이다.

 

 

 

 

 

 

◈ 르 꼬르뷔제

 

르 꼬르뷔지에의 원명은 샤를르 에두아르 쟌느레로 1887 10 6일 스위스의 작은 도시인 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 꼬르뷔지에가 견지한 건축사상은 합리주의적 사상과 낭만주의적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건축형태의 근원으로써 르 꼬르뷔지에가 응용하고 있는 공간관은 큐비즘과 미래주의에 영향받은 것으로, 사물에 일반적 관심을 던져준 큐비스트들과 공간을 인접한 대상물들이 침투하는 영역으로 파악한 미래주의자들의 공간개념이 꼬르뷔지에에 의해 건축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공간은 무한하며 어떠한 구속없이 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둘째, 공간은 모종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나 기하학에 의해서 치수가 결정되며 인식된다. 일반적인 구조는 장방형이며, 건축은 3차원적인 크로스 워드 (Cross Word)와 같이 어느 부분은 비어 있고 어느 부분은 꽉차있어 이 양자간에는 명확한 선이 나타나게 된다. 셋째, 관찰자와 매우 특수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관찰자와 공간의 어느 한 쪽은 이동한다는 유동적 공간개념이다.

이상과 같은 공간개념과 형태구성원리을 기초로 하여 공간의 볼륨이 구성되는데, 공간의 볼륨을 구성항는 요소로 꼬르뷔제는 벽을 선택한다. "공간은 빛을 받아 자신을 드러내는 벽에 의해서 연출되는 볼륨으로 형상화되며, 따라서 벽은 내부공간의 형태를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했다. 이처럼 벽이 내부공간의 볼륨을 결정하게 되면서 평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는 "평면이 매스와 표면의 구성에 질서를 부여하는 생성자 Generator 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건물은 매스와 공간의 비례가 적절하게 조화된 감감과 더불어 만족감을 주게 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비례라는 형태적 어휘가 공간에도 적용이 된다는 점이다. 공간의 3차원적 볼륨의 비례는 2차원적인 평면의 기하학적 원리에 의해 도출되는데 이러한 점은 꼬르뷔지에의 여러 작품에 일관된 흐름을로 유지되고 있다. 특히 꼬르뷔지에이 비례가 잡힌 매스와 공간을 규정해 주는 평면의 지배적 성격과 역할이 계속해서 발전하는 과정은 초기 주택에서 명확히 발견할 수 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하고 하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자칫 꼬르뷔지네를 기능주의자로 규정짓는 오류를 범하게도 하지만, 실제로는 각 방들의 기본적인 배치와 그 규모가 기능상의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한편 그 이후의 단계에서는 벽의 처리에 의해 다양한 공간을 연출하게 된다는 점에서 건축의 가능한 한 모든 요소르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공간개념은 논리와 이성의 요소들이 감성적이며 미적인 요소들과 하나의 연속적인 복합체로 구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창작활동에 이론적인 배경을 이루게 되는 구조개념은 최초의 주택을 지은 1905년에서 도미노 시스템(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건물에서 뼈대위에 슬래브를 얹고, 또 그위에 슬래브를 얹어나가는 개념)을 제안한 1914년까지의 10년간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구체화된다. 특히 그가 페레의 사무실에서 잠시 근무했던 1908년의 경험은 그의 건축활동에 새로운 차원을 갖게 했다. 이 사무실에서 그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관한 기초를 터득한 이외에도 고전건축의 질서를 체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페레와의 접촉에서 꼬르뷔지에느 철근콘크리트가 미래의 가장 중요한 건축 재료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는데. 페레는 꼬르뷔지에게 비욜레 르딕 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합리주의 건축철학을 고취시켰고 구조를 적절히 디자인하기만 하면 쉽게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자들의 논리를 접하게 했다. 또한 콘크리트라는 재료가 내구력이 있고 경제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콘크리트 골조가 고딕구조의 중심사상과 고전주의적 형식의 인문주의적 가치관과의 대립을 해소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접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꼬르뷔지에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역학적 효용성을 파악하게 되었고 철근콘크리트에 의한 합리적인 건축의 생산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되어 1915년 자신의 조형적 특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막스 뒤브와 함께 일련으 철근콘크리트 시스템을 구상했는데 이러한 시스템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미노 시스템은 경제성과 견고성, 그리고 시공속도와 질에 중점을 두고 개 발된 것으로써, 그가 1920년대에 맞이하게 될 획기적인 도약의 디딤판이 된 동시에 꼬르뷔지에 건축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 이 도미노 시스템상에서 골조의 각 치수는 그 기둥의 배치상태가 좋음에 따라서 내부공간에 무수한 조합을 가능하게하고 외벽에서는 의도한 만큼의 채광이 주어질 수 있었으므로 건축조형에 새로운 차원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였다.

모듈이라는 말을 '황금분할'과 관계시켜 새롭게 해석한 것이 꼬르뷔지에의 모듈러이다. 이 개념의 발상은 근대사회를 보는 꼬르뷔지에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인데, 그는 근대사회의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표준화와 프리패브리케이션(미리 만들어 조합하는 방식. 도미노 시스템 주택을 위한 철근콘크리트의 골조)의 방법을 통해서만이 해결될 수 잇응 것이라고 판단했고 주택의 대량생산이라는 사회적 당면과제를 풀 수 있는 프리패브리케이션은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치수시스템에 입각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발전시켰고 1948년 모듀러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 미스 반 데 로에

 

Mies van der Rohe가 걸어온 길

Mies는 르 꼬르뷔제, 라이트와 함께 근대 건축의 거장의 한사람이며 건축 기술의 공 업화와 새로운 건축재료, 시공 방법에 대하여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며 콘크리트· 유리 · 철을 사용해서 여러 실험적 작업을 수행했다. Mies의 이러한 순수한 형태에 대한 열 정적 집착과 재료 사용에 대한 신중한 배려는 아마도 어렸을 때의 경험(어려서부터 부친 의 공방에서 벽돌과 돌을 정확히 쌓아올리는 기술을 습득)에서 연유한 것인지 모른다.

라이트는 기계를 건물을 생산하는데 자연현상에 가깝도록 꾸밀 수 있게 하는 도구에 불 과하다고 생각하여 마천루는 수목같이, 주택은 동굴같이, 박물관은 조개 껍질같이 만들 기 위한 도구, 즉 그의 유기적 건축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알았고, 르 꼬르뷔제는 기술이나 예술이 모두 기하학적 형태에서 유도되는 것으로 알아 기술과 예술 사이에 모 순적 요소가 없이 해결하였다. Mies는 예술은 과학과 같이 합리적 면의 표현이라고 생 각하였다. 그래서 Mies의 생각은 라이트나 르 꼬르뷔제와는 달리 누구와도 전달 교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한 Mies 건축의 형태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Mies MoMA라는 약칭으로 유명한 뉴욕의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여기에는 20세기 초에 그가 발표한 유리마천루의 시케치가 전시되어 있다. 타우트를 연 상시키는 흑색 콘테의 강렬한 터치로 유리의 반사와 투명함, 구조의 독립을 표현한 일련 의 고층 사무소 계획은 1919년에서 21년의 베를린 시대에 발표한 혁신적 제안이었다.

캔틸레버의 구조, 단순한 아름다움과 명쾌함, 현대 건축의 특징이 모두 여기에 집약되어 있어, 후일 그가 미국에 건너가 이루어 놓은 스카이 스크레이퍼의 원칙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만년에 미국에서의 정연한 상자형 고층 사무실과는 다르게 부정형의 평 면으로 되어 있다. MIes는 거의 같은 시기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데 스틸 운동의 추상 성과 기하학적인 평면 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1910년 라이트 의 베를린 전시회로부터 '강렬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이때 Mies "우리들 젊은 건축 가들은 심한 정신적 혼란에 빠졌다. 이 거장의 작품은 어리둥절할 만큼 형태의 풍부함과 표현의 맑음을 지니고 있어 의외로 힘찬 건축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라고 고백했다 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초기에 베렌스의 신 재료에 대한 세밀하고 용이 주도한 취 급법과 베를린 전시회에서 라이트의 주택 평면 계획에서 얻은 바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1923년에 그가 발표한 '벽돌조 전원 주택'에서 매우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자 모양의 주택,혹은 구멍이 뚫린 상자의 연속으로서의 주택이라는 전통적 개념 을 완전히 불식하고 콤포지션으로서의 인식으로 이 주택은 근대 건축사의 새로운 이정표 를 만들었음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시대의 데 스틸파 화가 되스 부르그의 그림인 '러 시아 춤'의 리듬과의 유사성이 자주 지적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트의 초기 전원 주택을 그 모델로 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여러 개의 방들이 모인 중앙의 코어, 상호의 칸막이들은 부분적으로 개방되어 공간의 흐름을 강조하고, 전원으로 연장 되어 있는 긴 벽돌 벽에서 그러한 특징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계획한 콘크리트 조의 전원주택안은 다층의 테라스 형태로 되어 있어 대지 주변에 마치 바람개 비 같은 구성을 한 확산형 구조물이다. 주택의 수평성과 더불어 주요 계획 요소들에 맞 추어 만들어진 불규칙적인 매스의 결정은 당시의 국제주의 양식을 지배하던 공간을 각주 로 밀집되게 둘러싸는 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벽돌조 전원주택안과 콘크리 트 전원주택안은 근대 건축 발전에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 유럽의 건 축 공간에 대한 전통적인 의식중 주택 공간에 던져진 혁명적 형태이었다.

혁명적 형태라는 것은 19세기이래 역사적 양식의 모방과 절충을 되풀이하고, 쇠약하고 부패 한 건축 공간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음을 말하는 것이다. 벽돌은 구조 재료로 하는 건축은 예외없이 연속 벽이 건축 주변을 둘러싸야 하고, 지붕과 바닥이 일체로 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새로운 내용을 가진 창으로 벽이 알맞게 분단되어 있다. 창은 유럽에서는 역사 이래 벽 속에 뚫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의 창은 기성 개념을 근대적 내용으로 쇄신 하려고 태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Mies는 이 계획안에서 자기의 건축활동에 벽돌을 구조 재료로 사용하는 것으로 강한 제약을 가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새로운 건축 공간의 중요성에 대하여 명확한 주장을 표명하고 있다. Mies가 나중에 위대한 건 축가의 한 사람으로 성공할 자격은 그가 전통적으로 만들어지는 덩어리로서의 건축 공간에 대해 정면에서 대결하여 거기에 적극적인 비판을 가하고, 드디어 해체를 명령하 여 쇠약해진 건축 내부 공간에 새로운 공간을 도입하므로 다시 생기를 준 이 조그만한 계획안에서 이미 얻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Mies는 이러한 대담한 구상을 아직 실현시킬 수 없었으나, 처음으로 1923년 바로셀로 나 박람회의 파빌리온에서 실현하였다.. Mies는 여기에서 과거에 근대 건축의 탄생에 큰 자극을 준 박람회의 자유스러운 분위기와 참신함을 주려고 하는 공통된 열의와 호기심에 도움을 받아, 벽돌집에서 아직 남아 있었던 덩어리로서의 건축 공간의 자태를 소멸시키 고 벽, 지붕, 창같은 건축 공간의 구성 요소에 전혀 새로운 성격과 기능을 부여하였다.

여기서 벽은 건축 공간을 가두어 두고 붕쇄하려고 하지 않고, 단지 공간을 필요에 따라 차단하고 적당한 액센트를 주기 위하여 작용할 뿐이다. 벽돌 전원 주택과 바르셀로나 파 빌리온 사이에는 두 개의 건축구조체의 상위로 근본적으로 양상을 달리 하게 된 것이다.

전자는 전통적인 제약이 많은 구조 재료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후자는 폭넓은 가 능성을 가진 근대적 재료인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있다. 이 파빌리온에서는 평탄한 지붕 슬래브를 겨우 8개의 가는 크롬 합금의 강철주 위에 올려놓고 있어 전통적인 건축에서 밀접하게 연속되어 있는 지붕과 벽과 바닥만이 일체화할 이유를 상실하여 각각 새로운 기능과 형태를 부여받고 있다. 벽이 경쾌한 자태로 자유자재로 뻗어 있는 것은 벽이 이 제는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으며, 단지 기능에 따라 구획하는 역할만 맡으면 그 뿐인 때문이다. Mies가 파빌리온의 벽재료로 선명한 색채를 가진 대리석이나 줄호박돌을 사 용하여 이러한 새로운 재료의 극적인 표현을 강조한 것은 벽의 새로운 의의를 살리기 위 한 것이었다고 생각되어 지고, 신 재료에 의한 근대적인 구조체가 유리의 사용에도 새로 운 가능성을 졕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Mies가 창안한 공간의 성질은 평 탄한 슬래브로서의 지면에서 수 미터 떨어진 위치에 몇 개의 철주 위에 고정된 철근 콘 크리트 구형의 수평면으로 형성된 우주 공간의 일부인 건축 공간인 점에서 그의 천재적 창조력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벽돌조 주택 계획이나 바르셀로나 파빌리온에서 Mies가 생각해 온 건축 공간이 실제적으로 주택에 적용된 예로는 튜겐 하트(1930) 저택을 예로 둘 수 있다.

이 저택에서 우리는 Mies가 근대적 주택 공간의 제안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 1층의 개 방적 내부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튜겐 하트 저택의 1층 내부 공간은 가는 광택 있는 철주로 지지된 두 장의 수평면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Mies는 이 두 장의 슬래브 의 두 측면에 바닥에서 천정면까지 연속된 넓은 유리면을 두어 유동하는 것 같은 공간의 상호관입을 최대한으로 달성하였다. 50×80 피이트의 리빙 룸은 평탄면과 곡면의 두 개 의 간벽에 의하여 리빙 파트, 식당, 서재, 현관, 홀의 네 개의 각각 다른 기능을 전체적 인 공간의 통일을 분단함 없이 유기적으로 적절히 구획하고 있다. Mies는 튜겐하트 주 택을 마지막으로 그로피우스의 권유에 따라, 1930년 바우하우스 교장이었던 M.마이어의 뒤를 계승하게 된다. 그러나 시대가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여서 하교가 폐교되고 Mies 는 미국으로 이주해 가서 1938년 시카고에 있는 I.I.T. 공대(당시의 이름은 아르모르 대 학)로부터 초청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동 대학의 수많은 건물을 건설하였다. 24동의 건물 배치는 서로서로 직선적인 관계에 있어 한 눈으로는 전체를 내 다볼 수 없지만, 전체를 포괄하는 공간, - 즉 시간(TIME)이라는 차원을 포함하므로 다시 말하면 움직이므로 처음으로 지각될 수 있는 공간 -을 창조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Mies 24피이트의 모듈을 써서 그의 모든 비례 관계를 설정하고 있다. 비례를 취급하는 면 에서 볼수 있는 그의 신중성은 재료를 취급하는 그의 성질과 동일하다고 할수 있다. 이 비례와 구조와 재료에 대한 세련된 수법은 I.I.T. 대학 건물에서 완성되었다. 그후 그는 미국에서 레이크 쇼어 아파트(1951), 판스 워스 주택(1950),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안 (1953), I.I.T. 대학의 크라운 홀(1962) 등을 내 놓게 된다.  그 중 판스 워스 주택은 후기의 Mies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두 가지의 수평면 을 사용하여 계획된 것이다. 보편적인 오픈 스페이스 사이에 두 개의 절대적인 평면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그 기능적인 왜곡이 선험적인 결정에 의해 달성된 것은 아니 다. 왜냐하면, 판스워스 주택은 어지러운 주위 환경과 고립된 채 숲속에 자리잡은 단지 주말휴가를 보내는 한 사람만을 위한 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다랗고 개방적인 유 리벽의 사용과 자연의 풍부함과 대비된 세련된 기술의 상징으로서의 이상적인 해결책이 가능케 된 것이다. 두 개의 철재 평면에 칠해진 백색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적색·녹 색·갈색의 자연색과 대비되며, 이러한 대조는 단과 계단으로 인해 상이한 차원을 지닌 채 평면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사실 이 평면은 그 평면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I형 보에 위해 구성되어 있다. Mies 건축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I형보는 고유의 구조적인 의도보다는 시각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이 I형보는 구조적인 지지체일 뿐 아니라 시각적인 분할 테이기도 하다. 즉 유리벽은 창문이나 벽 또는 칸막이로서도 사용 된다. 결정적인 의미의 모호함이나 다의성 속에서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하 나의 대답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요소에 복잡성이 내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Mies의 작품 내면에 숨겨져 있는 이 신비는 다양한 경험에 적합한 일련의 결정 요인을 나열함에 의해서 보다는 꽉차인 전체로서 한 번에 인지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 스워스 주택의 기본 개념(일종의 개방된 파빌리온) I.I.T.공대에 있는 건축 및 디자인 학과를 위한 크라운 홀(1952-6)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떠 있는 듯한 계단들이 테라스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판스 워스 주택의 경우처럼 바닥 슬래브를 지면에서 몇 피이트 정도 들어올린 것 같은 형태로 되어 있다. 하지만, 외양에도 불구하고 크라운 홀 의 바닥 슬래브는 지하층 밑에서부터 지지되어지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되어 있다. 판스 워스 주택의 바닥 슬래브 밑이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면, 크라운 홀은 판유리로 끼워져 지하층과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런 식의 공간의 개방성은 지지물 위에 매달려 있는 듯한 2개의 슬래브에 의해 더욱 고양되고 있다. 또 이러한 개방된 파빌리온 형식을 따른 작품으로는 1953년 시카고의 컨벤션 홀과 서 베를린의 뉴 내셔널 화랑(1962-8)이 있는 데, 컨벤션 홀은 지붕 슬래브는 한 변이 9.1M인 입체 모듈 위에 엮어진 트러스들로 구성 된 3차원 구조물로 되었다. Mies 5만여 명의 수용 인원이 가능한 기둥 없는 내부 공 간을 만들기 위하여 스팬이 219.5M에 이르는 슬래브를 만든 것이다. 3차원적인 천정 트 러스의 외곽 부분으로부터 확장되어진 대각선 버팀대는 외벽을 2차원적인 트러스로 만들 어 버렸다. 이 버팀대는 하부의 보강 콘크리트 기둥 위에 직접 맞닿을 정도로, 건물의 전면을 가로 지르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서 베를린의 뉴 내셔널 화랑은 십자형 단부 로 된 8개의 지지물 위에 정간( ) 형태의 천정이 놓여져 있으며,. 각 코너 부분의 지 지물은 뒤로 후퇴되어 있는 형태이다. 깊숙이 뒤로 밀려난 유리벽은 몇 개의 움직일 수 있는 무대용 벽들에 의해서만 분할되어지는 전시 공간을 둘러싸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Mies의 작품과 그 외의 작품에서 우리는 그가 외벽에 위한 명확한 윤 곽(4각형, U자형 등)을 가진 상자형의 형태에서 복잡한 윤곽을 가진 직방체가 복합한 혹 은 면이 복합된 형태, 중정을 둘러싼 벽에 의한 명확한 윤곽을 가진 형태, 수평슬래브에 의한 명확한 윤곽을 가진 경계면이 투명 유리로 된 상자형의 형태로 점차적으로 발전되 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Mies의 변화와 그의 꾸준한 노력은 순수한 형태의 추구이었고, 동시에 건축가로서 방해가 되는 본질적이 아닌 모든 것을 배제하고 나아가 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Mies의 명구 "보다 적은 것일수록 보다 풍부하다(Less is more)"라는 말은 그의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나 그러한 그의 절대적이고 완전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모순 점도 있다. 로보트 벤츄리는 '적은 것은 결코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했으며, 루이스 멈포드는 그의 저서 '근대 건축 에 대한 반발'에서 많은 비평가들이 저질렀던 터무니없는 실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Mies는 우아한 무(nothingness)의 기념비를 만들어 내기 위해 철과 유리를 사용했 다. 그것들은 아무런 내용이 담기지 않은 삭막한 기계 양식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Mies 자신의 순수 취향이 이러한 텅빈 유리(shell)의 수정과 같은 순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Mies머리 속의 관념적인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고 대지·기후·기 능 또는 내부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친근한 가능성을 배 제한 채 거실에 배치된 형식적인 의자와 같이 현실에 등을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 은 강제적이고, 관료적인 정신의 신격화인 것이다. 그것은 Mies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 고 있는 것보다 휠씬 더 표현적인 것이었다. " 라고 졛玖庸 Mies의 실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Mies가 표현하고자 하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실현이 성공했다거나 실패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Mies van der Rohe는 한 시대를 풍미한 근대 건 축의 거장이며 나는 그의 단순한 매스가 주는 명쾌함과 시원함이 좋기도 하고 어느 때는 변화가 없는 그의 작품의 모습이 싫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Mies의 생각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것만으로도 Mies van der Rohe가 우리에서 주는 메시지는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1867   미국 위스콘신주 리릴랜드센터에서 목사이자 음악가인 아버지 윌리엄 라이트와, 웨일즈출신의 안나 로이드 라이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   위스콘신대학에 입학, 건축과가 없어 토목과에 다님. 토목과 교수인 알렌 D. 코노버교수 밑에서 제도사로 일하며 "구조는 수단이고 건축은 결과이다. 건축가가 구조 계획할 때에는 재료를 성질에 따라 써야 한다."라는 것을 깨우쳤다.

 

1887   대학을 중퇴하고 시카고의 레이만 실비스 사무소에서 일함. 일년도 못되어(8개월만에) 퇴사하고 유럽의 낡은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런 형태를 지향하는 건축을 만들어내는 루이스 헨리 설리반 사무소에 들어가게 되고, 그를 평생 스승으로 생각함.

 

1893   자신의 사무소를 시카고에 개설. 시카고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림. 시카고 박람회는 스승 설리반 이외의 모든 외부로부터의 영향을 부정하던 라이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특히 일본과 동양의 건축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1893~1910   이른바 라이트의 제 1황금시대(사무소 개설시 부터 1910년까지에 그는 200개 가까운 건물을 설계했다. 소위 자연과 대지에 융합한 전원주택(Pririe House)을 설계한 시기이며 주요 작품은 윈슬로우(Winslow)주택(1893), 로비(Robie)주택(1909), 라킨 빌딩(1904),유니티 교회(1906)가 있다.

 

19111935   소의 침묵의 기간. 두 번의 이혼과 스캔들, 탈리아신(Taliesin, 그의 사무소의 화재 사건 등에 휘말려 해외 도피 및 은둔의 생활로 작품 활동이 전시대에 비해 거의 없었다. 미드웨이 가든(Midway Garden, 1914), 일본의 제국호텔(Imperial Hotel, 19151922), 탈리아신 이스트(Taliesin East, 1925이 이 시대에 건립된 걸작들이다.

 

19361959   1황금시대 이후 20년이 지나 라이트는 제 2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0여 년의 공백기간을 깨뜨리는 카프만(Kaufmann)주택(1936)과 존스왁스회사 (1936)를 설계하게 되었다. 라이트는 일명 낙수장이라고도 불리는 카프만 주택의 건축에는 그의 유기적 건축이론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이어서 공간의 연속성과 구조의 조형성을 강조한 걸작인 존슨왁스회사의 사무소를 설계했다. 또한 많은 유소니언(Usonian)주택 들을 설계했다. 그것은 제 1황금시대의 전원주택을 근대화시킨 것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 공간과 빛 그리고 자유의 새로운 정신으로 토지를 사랑한다는 민주주의 정신에 걸 맞는 것이다. 또한 제 2황금시대 최대 걸작중의 하나인 구겐하임 박물관(19561959)은 공간의 연속성과 구조의 조형성이라는 개념이 발달하여 경사로를 통로인 동시에 전시공간으로 발전, 전개시켰다.

 

1959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서거한 후 고향인 리릴랜드센터에서 가까운 위스콘신주의 스프링그린에 이장되었는데 도시를 싫어하고 기계문명에 대하여 대항하여 독창적인 창조를 구현하였던 그에게 위스콘신주 그 곳은 영원한 안신처가 되었다.

 

 

1894년 공공 연설에서 처음으로 '유기적(organic)'이라는 말을 썼다. "당신의 주택이 그것의 장소로부터 쉽게 확장될 수 있고, 그곳 자연이 근사하다면, 그곳의 환경과 호흡을 같이 하도 록 하게 하라. 만약 그렇지 않다면, 건축물이 마치 그러한 기회를 가졌던 것처럼 그 장소에 서 조용하게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라." - organic growth

그는 "유기적 건축"이라는 것을 '시간' '장소' '인간'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정의했다. 이 세 가지 원리가 그의 일생 동안 그의 건축물을 지배했다.

우선 시간. 20세기 건물은 17세기 건물을 모방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건물은 현대에 더이상 적용될 수 없는 과거만의 삶의 방식과 사회 양식 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재료 에 담겨 있는 나름대로의 본성을 잘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장소. 장소에 적합하려면 그것은 주위 환경, 경관을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 그 예로 prairie house. 지평선을 따라 확장되도록 만들었다. 주거층은 위로 올려서 주변 환경의 경치 를 제공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낙수장. 그것은 건물과 장소가 조화롭게 엉켜 있는 궁극적인 예이다.

마지막으로 인간. 건물의 목적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에서도 인간을 단위 길이로 사용했다. 그리고 건물의 reality는 벽이나 천장이 아니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의 '공간'이다. 그의 초기 집에서, 건축적 공간을 자유화시켰다. 불필요한 파티션은 없앴다. family house open plan을 제공하였다.

라이트의 위대한 시작(1889-1898) 1887년에서 1893년까지 그는 Adler Sullivan의 사무소에 고용되었다.

라이트는 태어나서 처음 20년을 위스콘신의 남서부에서 보냈다. 부모님 모두 교육을 많이 받으셨던 분이었다. 어머니는 독일 교육자인 프래드리히 프로뵐에게 자식을 교육시켰다. 프 레벨은 자연을 모방하게 시키기보다는 나무 상자, 큐빅 그리고 구 들을 이용해 확장시키면 서 시각 훈련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라이트에겐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 이었다. 또한, 삼촌의 농장에서 라이트는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했다. [() 나무의 뿌리] 그리고 시골의 삶에 대한 영원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 그의 어머닌 라이트가 태어나기도 전 에 자식이 남자아이일 것이며 그는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 월터 그로피우스

 - Wlater Groupus(18831969)

 

  월터 그로피우스는 유명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창시자이며, 건축학 교수이자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국제 건축을 육성하는데 보내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역할 - 물론, 서로 관련 있는 분야이기는 하지만 - , 건축가, 교육자, 비평가로 일했다. 1901년 샤로텐부르크와 뮤니히에서 처음으로 건축교육을 받았으며, 러스킨(I.Ruskin)과 모리스(W.Morris)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에 설계한 파그스 제화공장(Fagus Werke)은 과거로 부터 내려온 벽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우수와 추위, 그리고 소음을 배제하기 위해 가구의 직립주 사이에 친 스크린으로 벽을 대신하였다.

  그로피우스는 1919, 국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일하며 새로운 조형교육의 선두주자로서 진정한 산업예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교육을 실현시켰다. 이 새로운 시도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는 '국제건축(Internationale Architektur)'를 표방한 그는, 현대건축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베르그분트의 조류 속에서 획기적인 작품들을 발표하며 새로운 건축활동의 큰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그가 제창한 주택공업은 기능 충족, 합리적 생산방식에 근거한 주택의 모든 부재를 규격화, 표준화하여 공장 생산화를 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지금까지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시공에 거의 물을 사용하지 않는 '건식조립 구조'를 바우하우스의 실험주택(1923)과 와이젠호프주택전(1927)에서 시험하였고, 규격화된 건식구조법에 의한 바우하우스 교수주택, 데소노동국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28년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을 사임한 그는 베를린에 건축사 사무소를 개설, 건축생산의 규격화, 공업화에 대한 그의 생각을 실현하였다.

기계에 의해 성립되는 근대산업을 인정하고, 산업과 예술을 통합한 그의 활동은 동시대 新건축의 모범이 되었다. 1937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 그가 설립한 TAC(건축설계 공동체:The Architects Collaborative)의 협조를 받아 설계한 하버드대학 센터(1949), '7인의 건축가'와 공동으로 설계한 7개의 기숙사와 공용시설중심(Commons Bidg)은 학교 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50년 체스터 니켈은 그로피우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건축의 용어와 디자인이라든가 커뮤니티계획이라는 말로 우리들에게 산업혁명을 가르쳐 준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항상 공업사회의 위대한 가능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부단히 변화하는 인간의 요구에 동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출처 : FX군단★★★★★
글쓴이 : Asclepiu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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